우디 스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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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디 스트로드는 미국의 배우이자 운동선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UCLA에서 십종 경기를 하며 운동선수로 두각을 나타냈고, 미식축구 선수와 프로 레슬러로도 활동했다. 1940년대 초 배우로 데뷔하여 다양한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특히 스파르타쿠스 (1960)에서 검투사 드라바 역으로 이름을 알렸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흑인 배우로서 주연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의 지위를 확립하며 흑인 배우의 입지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1994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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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스트로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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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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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우드로 윌슨 울와인 스트로드 |
출생일 | 1914년 7월 25일 |
출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사망일 | 1994년 12월 31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도라 |
학력 | UCLA |
직업 | 배우 미식축구 선수 작가 |
활동 기간 | 1941년–1994년 |
배우자 | 루키알루아나 칼라엘로아 (사망) 티나 톰슨 (1982년 결혼) |
자녀 | 2명, 칼라이 포함 |
미식축구 경력 | |
포지션 | 오펜시브 엔드 |
고등학교 | 토머스 제퍼슨 (CA) |
대학교 | UCLA |
팀 | 할리우드 베어스 (1940–1942) 로스앤젤레스 램스 (1946년) 캘거리 스탬피더스 (1948–1949) |
주요 수상 | 그레이 컵 우승 (1948년) CFL 웨스트 올스타 (1948년, 1949년) All-PCC 퍼스트 팀 (1939년) All-PCC 세컨드 팀 (1937년) |
경기 출전 수 | 10 |
리셉션 | 4 |
리시빙 야드 | 37 |
군 복무 | |
소속 | 미국 육군 항공대 |
2. 초기 생애 및 운동 경력
우디 스트로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뉴올리언스 출신이었으며, 그의 할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체로키 혈통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으며, 그의 할머니는 크리 혈통이었다.[1]
그는 로스앤젤레스 남동부에 있는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LA에 진학하여 알파 파이 알파 형제회의 회원이었다. 1971년 인터뷰에서 "저는 역사와 교육을 전공하면서 문화 교육을 받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2]
그의 세계적인 수준의 십종 경기 능력은 약 15.24m 이상 포환던지기 (당시 세계 기록은 약 17.37m)와 높이뛰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 스트로드는 후베르트 스토위츠의 호평을 받은 운동선수 초상화 전시회(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일부)에서 누드 초상화 모델을 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는 흑인과 유대인 선수들의 참여로 인해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3][4]
대학 시절에 케니 워싱턴, 재키 로빈슨과 함께 1939년 UCLA 풋볼팀에서 활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퍼시픽 코스트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 할리우드 베어스에서 뛰다가 27세에 미국 육군 항공대에 징집되어 괌과 마리아나 제도에서 폭탄 하역 임무를 수행했고,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의 마르치 필드에서 육군 풋볼 팀에서 뛰었다.[5]
전쟁 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찰청에서 소환장 전달 및 죄수 호송 업무를 했다.[5] 스트로드와 케니 워싱턴은 NFL에서 뛴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두 명이었다(1933년부터 1946년까지 NFL에서 흑인 선수 활동 금지).[5] UCLA 팀 동료였던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인종 장벽을 깼다.[5]
프로 레슬링 경력 부분에서 설명하듯이, 1941년 프로 레슬링을 시작했고, 1949년 축구 선수 은퇴 후 1962년까지 고저스 조지 등과 경기를 가졌다.[6]
2. 1. 대학 시절
케니 워싱턴, 재키 로빈슨과 함께 1939년 무패의 UCLA 브루인스 풋볼팀에서 활약했으며, 이들은 4명의 백필드 선수 중 3명을 구성했다.[4] 그들은 "골드 더스트 갱"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5]레이 바틀렛과 함께, 다른 대학 풋볼 팀에서 소수의 선수들만이 뛰고 있을 때, 브루인스에는 4명의 흑인 미국인 선수들이 있었다.[6] 이들은 결국 컨퍼런스와 헬름스 전국 챔피언인 USC와 득점 없이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이 경기에는 챔피언십과 1940 로즈 볼이 걸려 있었다. 이 경기는 전국적인 의미를 갖는 최초의 UCLA–USC 라이벌전 풋볼 경기였다.[7] UCLA 시절에는 미식축구 외에도 농구를 했으며, 재키 로빈슨과 팀 동료였다.[29]
2. 2. 프로 풋볼 경력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스트로드는 퍼시픽 코스트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의 할리우드 베어스에서 뛰고 있었다. 27세에 징집되어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여 괌과 마리아나 제도에서 폭탄을 하역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의 마르치 필드에서 육군 풋볼 팀에서 뛰었다.[8]전쟁 후, 그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찰청에서 소환장 전달 및 죄수 호송 업무를 했다.[8] 스트로드와 케니 워싱턴은 주요 대학 프로그램과 현대 내셔널 풋볼 리그(NFL)에서 뛴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두 명이었다 (당시 라이벌인 올-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와 계약한 마리온 모틀리와 빌 윌리스와 함께). 1946년 로스앤젤레스 램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33년부터 1946년까지 NFL에서 흑인은 뛰지 못했다.[8] UCLA의 팀 동료였던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인종 장벽을 깰 것이다 (실제로 로빈슨, 스트로드, 워싱턴은 모두 그 해 초반에 세미 프로 퍼시픽 코스트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에서 뛰었다).

1939년경, 스트로드, 워싱턴, 로빈슨은 UCLA에 미국 풋볼 역사상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선사했다. 이로 인해 세 사람의 명성이 높아졌고, 팬들은 그들을 "골드 더스트 갱"이라고 불렀다. 우디 스트로드는 엔드 포지션 선수 중 한 명이었고, 케니는 러닝 백이었다. 당시 프로 풋볼에 합류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할리우드 베어스에서 세미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5]
스트로드는 팀과 함께 원정 경기를 하면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라면서 알지 못했던 인종차별을 처음 경험했다. "우리는 인종에 대해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앰배서더 호텔의 나이트클럽인 코코넛 그로브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아 도널드 노비스의 노래를 듣곤 했습니다. 누군가 '저기에 흑인이 있다'고 말하면, 저는 누군가처럼 '어디요?'"[9] 그 또한 "퍼시픽 코스트에서는 우리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을 벗어나면서 우리는 이러한 인종적 갈등을 발견했습니다. 젠장, 우리는 우리가 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10] 그가 인종 장벽의 희생자가 된 한 예는 내셔널 풋볼 리그가 백인 선수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에 대응했을 때였다.[5]
1948년, 그는 올-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의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지만, 시즌 시작 전에 방출되었다.[11] 이후 그는 캐나다의 웨스턴 인터프로빈셜 풋볼 유니언의 캘거리 스탬피더스에 합류하여 1948년 캘거리의 그레이 컵 챔피언십 팀의 일원이 되었지만[12] 1949년 부상으로 은퇴했다. 그는 갈비뼈 두 대와 어깨뼈가 부러졌다. 그는 "마치 조 루이스와 싸운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13] UCLA 시절에는 미식축구 외에도 농구를 했으며, 재키 로빈슨과도 팀 동료였다.[29]
1946년에는 NFL의 로스앤젤레스 램스에 입단했다. 케니 워싱턴과 함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로서 최초의 NFL 선수가 되었다. UCLA의 팀 동료였던 재키 로빈슨도 같은 해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입성했다. 1948년, 1949년에는 캐나디안 풋볼 리그의 캘거리 스탬피더스에서 뛰었다.
2. 3. 프로 레슬링 경력
1941년, 스트로드는 몇 달 동안 프로 레슬링에 잠깐 발을 담갔다.[14] 1949년 축구 선수 생활을 마친 후, 1962년까지 연기 활동 틈틈이 레슬링을 다시 시작하여 고저스 조지와 같은 선수와 경기를 가졌다.[14]1952년 8월 12일부터 1952년 12월 10일까지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에서 거의 매주 레슬링 경기를 했다. 1962년에 퍼시픽 코스트 헤비급 레슬링 챔피언과 퍼시픽 코스트 흑인 헤비급 레슬링 챔피언으로 불렸다.[14] 그는 이후 태그 팀을 이루어 보보 브라질[15] 및 베어캣 라이트와 함께 활동했다. 그의 파이트 스타일은 고저스 조지와 같았다.
3. 배우 경력
우디 스트로드는 1941년 영화 《선다운》에서 원주민 경찰 역으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이후 《스타 스팽글드 리듬》(1942), 《노 타임 포 러브》(1943) 등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다.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스트로드는 여러 영화와 TV 시리즈에 출연하며 흑인 배우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스파르타쿠스(1960)에서 검투사 드라바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으며, 존 포드 감독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 그의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에서도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고, 198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95년 영화 《퀵 앤 데드》를 마지막으로 배우 경력을 마감했다. 그는 흑인 배우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선구자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3. 1. 초기 활동 (1950년대)
제작자 월터 미리쉬가 우디 스트로드가 레슬링하는 모습을 보고 ''정글 보이 봄바'' 시리즈 중 하나인 ''사자 사냥꾼''(1951)에서 아프리카 전사 역으로 캐스팅하면서 그의 배우 경력이 다시 시작되었다.[16] 제작진은 그에게 머리를 깎을 것을 원했고, 그는 주당 500USD를 제안받기 전까지는 꺼렸지만, 제안을 받자 "좋아요, 족집게가 어디 있죠?"라고 말했다. 스트로드는 "나는 대머리로 세상 시장에 나갔어요. 평생 갇힌 거죠. 결국,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되었어요."라고 회상했다.[13]이후 그는 ''고릴라의 신부''(1951), ''아프리카의 보물''(1951)(''봄바'' 영화), ''위험한 임무''(1952) 에피소드, ''캐리비안''(1952), 그리고 사자 역을 맡은 ''안드로클레스와 사자''(1952)에 출연했다. 그는 ''안드로클레스와 사자''에 대해 "내가 가진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말했다.[18]
스트로드는 로버트 라이언, 앤서니 퀸과 함께 버드 보티처 감독의 ''바닷속 도시''(1953)와 ''로열 아프리카 라이플스''에 출연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는 텔레비전 시리즈 ''정글의 라마''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아프리카 전사 역을 연기했다.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1954)에서는 검투사 역을 맡았고, 정글 짐 영화인 ''정글 맨이터스''(1954)에도 출연했다. 그는 ''나체스의 도박사''(1954),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는 보워리 보이즈 영화인 ''정글 젠트''(1954), ''실버 챌리스''(1954) 등에서도 볼 수 있었다. TV 각색판인 ''만드레이크 더 매지션''(1954)에 출연했고(시리즈 파일럿으로 제작되었지만 채택되지 않음), ''신밧드의 아들''(1955), ''솔저스 오브 포춘''(1955), 일본 영화 ''부루바''(1956)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조니 와이즈뮬러의 1955–1956년 방송 신디케이션 텔레비전 시리즈 ''정글 짐''에 한 번 출연했고, ''개인 비서''의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
세실 B. 드밀은 ''십계''(1956)에서 그를 주당 500USD를 받고 5주 동안 노예로 캐스팅했다. 에티오피아 왕 역할을 할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스트로드에게 그 역할도 맡겼다.
그는 ''타잔의 생존을 위한 싸움''(1958)에서 조연을 맡았고, ''해적''(1958)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1959년에는 비판적인 찬사를 받은 ''포크 찹 힐''에서 갈등하는 프랭클린 일병 역을 연기했는데, 그는 이 역할을 "내가 했던 첫 번째 드라마적인 일"이라고 말했다.[5] 그는 ''블랙호크의 사나이''(1960)에 게스트로 출연했다.[17]
3. 2. 명성 상승 (1960년대)
월터 미리쉬 제작자가 우디 스트로드가 레슬링하는 모습을 보고 ''사자 사냥꾼''(1951)에서 아프리카 전사 역으로 캐스팅하면서 그의 배우 경력이 다시 시작되었다.[16] 제작진은 그에게 머리를 깎을 것을 제안했고, 그는 주당 500달러를 제안받기 전까지는 꺼렸지만 결국 "좋아요, 족집게가 어디 있죠?"라고 말했다. 스트로드는 "나는 대머리로 세상 시장에 나갔어요. 평생 갇힌 거죠. 결국,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되었어요."라고 회상했다.[13]이후 스트로드는 ''고릴라의 신부''(1951), ''아프리카의 보물''(1951), ''위험한 임무''(1952), ''캐리비안''(1952), ''안드로클레스와 사자''(1952) 등에 출연했다.[18] 버드 보티처 감독의 ''바닷속 도시''(1953)와 ''로열 아프리카 라이플스''에도 출연했으며, 1952–1954년 텔레비전 시리즈 ''정글의 라마''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아프리카 전사 역을 연기했다.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1954), ''정글 맨이터스''(1954), ''나체스의 도박사''(1954), ''정글 젠트''(1954), ''실버 챌리스''(1954) 등에도 출연했다. TV 각색판인 ''만드레이크 더 매지션''(1954)에 출연했고, ''신밧드의 아들''(1955), ''솔저스 오브 포춘''(1955), ''부루바''(1956) 등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조니 와이즈뮬러의 텔레비전 시리즈 ''정글 짐''과 ''개인 비서''의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
세실 B. 드밀은 ''십계''(1956)에서 그를 노예와 에티오피아 왕 역할로 캐스팅했다.
''타잔의 생존을 위한 싸움''(1958), ''해적''(1958)에 출연했고, 1959년 ''포크 찹 힐''에서 프랭클린 일병 역을 연기했다.[13] ''블랙호크의 사나이''(1960)에 게스트로 출연했다.[17]

스파르타쿠스(1960)에서 검투사 드라바 역을 맡아 커크 더글러스가 연기한 스파르타쿠스와 대결했다. 드라바는 승리하지만 스파르타쿠스를 죽이는 대신 싸움을 사주한 로마 군 지휘관을 공격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항해(1960)''에서 보일러공 역을 맡았다.
존 포드 감독과 ''포크 찹 힐''을 제작하며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포드는 ''세리전트 러틀리지(1960)''에서 주연을 맡겼다. 스트로드는 이 영화에 대해 "그것은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존 포드는 내 입에 고전적인 단어를 넣어줬다... 존 웨인이 전에 했던 것처럼 흑인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흑인도 스크린에서 가졌던 것보다 페코스 강을 건너는 가장 위대한 영광의 할렐루야를 누렸다. 그리고 내가 직접 했다. 내가 그 강을 건너 모든 흑인들을 데리고 갔다."라고 회상했다.[13]
''레이첼 케이드의 죄''(1961)에 출연했고, ''로하이드''에 두 번 게스트로 출연했다. 포드는 ''투 로드 투게더''(1962)에 그를 캐스팅했고,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존 웨인의 고용인 폼페이 역으로 출연했다.
1963년, ''타잔의 세 가지 도전''에 출연했다. ''더 리에우테넌트'', ''파머의 딸'', ''대니얼 분''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징기스칸''(1965)과 ''7인의 여성''(1966)에 출연했다. 스트로드는 포드 감독을 "아들처럼 대했다"고 말하며 그와 매우 가까웠다.[18] 포드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스트로드는 4개월 동안 그의 간병인으로 지냈고, 그의 임종을 지켜봤다.
1960년대 후반, 론 엘리의 ''타잔'' 텔레비전 시리즈와 ''배트맨''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프로페셔널스''(1966)에서 뛰어난 궁수이자 용병으로 주연을 맡아 인지도를 높였다.
1967년, ''제10기병대의 이야기''를 제작하려 했지만, 제작되지 못했다.[18]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유럽에서 활동했다.[5]
3. 3. 유럽 활동 (1968-1971)
1968년, 스트로드는 파트리스 루뭄바를 연상시키는 역할을 맡은 영화 ''블랙 지저스''(Seduto alla sua destra)에서 주연을 맡았다. 당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영화는 현재 거의 잊혀졌다.[18] 그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웨스트의 무법자''(1968) 오프닝 시퀀스에서 총잡이 역할[18]을 맡았으며, ''샬라코''(1968)에서는 인디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유럽에 머물기로 결심했는데, "청바지 다섯 벌이 있었고, 외로웠고, 언어도 할 줄 몰랐어요. 하지만 제작자들은 '필요 없습니다. 말만 타면 됩니다'라고 대답했죠."라고 회상했다.스트로드는 ''체!''(1969)에 출연했고, 이탈리아에서 촬영된 ''부트 힐]''(1969)에서는
3. 4. 1970년대 이후
1970년대에 스트로드는 《쿠바 크로싱》(1980), 《해저드 가의 듀크》(1980), 《스크림》(1981), 《환상의 섬》(1981), 《비질란테》(1982), 《Invaders of the Lost Gold》(1982), 《Angkor: Cambodia Express》(1983), 《검은 종마 2》(1983), 《The Violent Breed》(1984), 《정글 워리어스》(1984), 《코튼 클럽》(1984), 《The Final Executioner》(1984), 《Lust in the Dust》(1985), 《On Fire》(1987), 《A Gathering of Old Men》(1987)에 출연했다. 그는 《스토리빌》(1992)과 《포세》(1992)에 출연하여 마리오 반 피블스 감독과 함께 작업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샤론 스톤, 진 해크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러셀 크로우가 출연한 《퀵 앤 데드》(1995)였으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개봉 직전에 사망한 스트로드에게 헌정되었다.[19]4. 사망 및 유산
1994년 혀암으로 사망했다.
현역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중이었으며, 사망 당시 차기작에 기용을 결정했던 감독도 많았다고 한다. 샘 레이미 감독 또한 흑인 배우 창생기부터 전성기를 살아온 선구자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5. 개인사
우디 스트로드는 하와이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의 먼 친척인 루키아루아나 칼라엘로아 공주(일명 루아나 스트로드)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는 이 결혼에 대해 "할리우드의 백인들이 반응하는 것을 보니 마치 라나 터너와 결혼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5]
루아나와의 사이에서 아들 칼라이(1946–2014, 텔레비전 감독)와 딸 준, 두 자녀를 두었다. 1980년 루아나가 파킨슨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21][22] 1982년, 스트로드는 68세의 나이에 35세의 티나 톰슨과 재혼했고,[22] 1994년 12월 31일 캘리포니아주 글렌도라에서 폐암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23] 그는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 있는 리버사이드 국립묘지에 묻혔다.[24]
스트로드는 세이신도 켄포의 달인인 프랭크 랜더스 밑에서 무술에 전념했다.[25]
6. 저서
스트로드는 자서전 ''골 더스트''를 저술했다.
7. 수상 및 영예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애니메이션 영화에 등장하는 보안관 우디는 스트로드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으며,[26] 텔레비전 드라마 ''사이코''에 등장하는 샌타바버라 검시관 역할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다.[27]
8. 출연 작품
우디 스트로드는 스턴트 배우 경험을 바탕으로 194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배우 경력은 흑인 배우가 겪었던 차별의 역사와 맞닿아 있으며, 흑인 배우가 영화의 주역을 맡는 현재 상황의 기반을 다진 선구자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1951년 제작자 월터 미리쉬에게 레슬링하는 모습이 발탁되어 ''정글 보이 봄바'' 시리즈 중 하나인 ''사자 사냥꾼''(1951)에서 아프리카 전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배우 경력이 다시 시작되었다.[16] 이후, ''고릴라의 신부''(1951), ''아프리카의 보물''(1952), ''위험한 임무''(1952) 에피소드, ''캐리비안''(1952), ''안드로클레스와 사자''(1952) 등에 출연했다.[18]
1952년부터 1954년까지는 텔레비전 시리즈 ''정글의 라마''의 여러 에피소드에 출연하여 아프리카 전사 역을 연기했다.[16] 세실 B. 드밀은 그를 ''십계''(1956)에서 주당 500USD를 받고 5주 동안 노예로 캐스팅했고, 에티오피아 왕 역할도 맡겼다. 그는 ''타잔의 생존을 위한 싸움''(1958)에서 조연을 맡았고, ''해적''(1958)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1959년 그는 ''포크 찹 힐''에서 프랭클린 일병 역을 연기했다.[13] 그는 ''블랙호크의 사나이''(1960)에 게스트로 출연했다.[17]
이후, 퀵 앤 데드 (1995년), 파시 (1993년), 스토리빌 (1992년), 노인들의 모임 (1987년)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8. 1. 영화
원제Sundown
No Time for Love
Caribbean
City Beneath the Sea
Demetrius and the Gladiators
The Gambler from Natchez
Pork Chop Hill
The Last Voyage
Sergeant Rutledge
Spartacus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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